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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내 기억 속에 살아 있어요.

bgm 눈사람 _정승환.


일제 강점기 조선,



- 천천히 드셔라, 감자 더 없심더.

- 그 많던 감자는 다 어디 갔는교.

- 다 어디 갔기는예, 다 이 뱃 속에 있지예.

- 그러한가, 정국이는 지금 뭐헌단가.

- 정구이 학교서 보작대기 내놓고 사라졌는디예.

- 그 놈의 자슥, 공부는 제대로 하고 있는 갑제?

- 글쎄예, 계속 이리 건강하기만 해 줬음 좋겄구만야.

- 아야, 내 없이도 잘 할 수 있제? 

- 그런 거 하지 마셔라, 작별 인사 같은 거, 아직 정국이한텐 말도 못했심더.

- 내는 너 아랑 혼인한 거에 너무 감사하고 내 평생 잘한 일이다. 아야, 내 마이 미안타이.

- 하지 마시라니까예. 내 그리하심 못 보내 드립니더.


꼬옥 붙잡힌 양 두 손과 마지막일 지도 모르는 깊은 포옹. 가슴 깊숙이부터 나오는 눈물이 일렁이고 두텁고 거친 손이 볼살을 스쳤다. 


‘ 우리 아들 정국아, 어디가서 아부지 덕에 어깨 피고 다닐 수 있도록 아부지 열심히 할 테니 말이다, 어무니 옆에서 이제 이 집에 가장은 너 뿐이니께 잘 부탁한다. 내 우리 아들 믿어도 되지? 사랑하고, 건강해야 한다. ’


그 편지가 아버지의 유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작별 인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떠나 보내야 했다. 아들은 유골이 담긴 그릇, 아내는 국화를 들고 색바랜 영정 사진 행진을 나섰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절대 보내지 않았을 거라며 통곡하는 어머니를 품에 꼭 껴안고 등을 쓰다 듬었다. 



안 그래도 짧은 머리에 바리깡이 웅웅대며 지나가고 더 짧아진 머리. 대충 손바닥으로 까슬거리는 느낌을 만져 대다 모자를 눌러 썼다.


- 아부지 뭐 하시노.

- 아부지 독립군이셨는데요.


그 누구보다도 차분하고 굳건한 정국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 어무니는.

- 뭐, 매일 밥 하시지요.

- ..고생이 많다.

- 어무니가 고생 많으시지요. 저는 하는 게 없는데요.

- 그래, 그래. 알았다. 들으가라.

- 예.


새 학교, 첫 등교. 국민학교에 이어 중학교 그리고 마지막 고등학교였다. 정국은 이 형편과 이 실력에 대학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어머니 잘 모시고 살다 눈을 감는 것이 현실적으로 그려진 목표. 그리고 그 현실 아래에 감춰진 꿈틀거리는 욕망. 정국에겐 독립군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시끄러운 교실 안, 언제 들어 왔는지도 모르는 선생이 들어와교탁을 두어번 내리쳤다.


- 아새끼들 주둥아리 안 닥치나. 첫 날부터 매일 보던 지겨운 촌놈들만 보느라 지겨웠제. 여 서울서 온 아들이니 괴롭히다 걸리믄 목아지다. 그런 건 니들이 더 잘 알제?


- 쌔앰, 이럴 땐 신고식 같은 거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 마, 하게 생깃나. 이야 옷 때깔 보이나 인마들아. 우리 같은 아들이랑은 비교가 안 된다. 


색색결의 옷과 찢어지면 여러 천을 겹붙여 입은 누더기 옷은 확연히 그들의 격차를 보여 주었다.


- 저 뒤에 둘이 같은 앉으면 쓰겄네, 가 앉아라.


- 마, 이름이 뭐가.

- 제게 말씀하십시오.

- 으욱 이게 서울말이가. 내는 오그라든다.

- 공주님에게서 떨어지십시오.

- 뭐가, 공주님? 너네 무슨 귀족 놀이 하나?

- 죄송합니다만, 일정 거리를 유지해 주십시오.


유독 반짝거리는 지민과 그 옆을 지키는 태형. 태형은 지민을 싸고 도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그 옆을 꿋꿋이 지키고 지민은 무서울 정도로 아무 말도 표정도 없이 그 자리에 앉아, 미동도 없이,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고 정국은 그런 지민과 태형에게 관심 없다는 듯 멀리서 앉아 한 데 모인 반 아이들을 보며 영화 잡지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주변은 시끄럽고 양 옆에선 이름이 뭐냐는 둥 말이 많은 데에도 아무 말 없이 주변 허공만을 응시하다 입을 뻐끔거리더니 이내 다시 입을 굳게 닫았다.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설마, 저 상황을, 지금 자기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건가. 아님, 귀가 안 들리는 건 아닐까.

순간적으로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다. 정국이 먼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다시 슬쩍 지민을 보자, 자신관 다르게 본인을 여전히 똑바로 쳐다 보고 있는 지민이었다.


서울 애들은 다 저런가. 말도 없고 인사도 없고, 표정도 없고. 쿵쿵쿵쿵, 뭐지, 정국이 제 손바닥을 가슴 위에 올렸다. 느껴지는 진동. 거세게 열리는 문.


- 정국아, 선생님이 반장 오라셔.

- 어, 응.


아, 발걸음 소리였나 보다. 심장은 원래 뛰는 게 정상이니까. 정국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 부르셨다고요.

- 어, 그래, 반 아들이 전학 온 아들 괴롭히진 않디?

- 어..예, 그닥, 오히려 즐기는 것 같기도..

- 뭐라고? 

- 예? 아니, 아닙니다. 네 괜찮아요.

- 알았다. 그럼 됐다.


선생님이 이런 거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네. 안색도 그닥 별로고 목소리도 살짝 떨려있었다. 마치 굉장히 조심스러운 기밀정보를 캐묻듯.


어른들은 비밀이 많다. 속내를 알 수 없고 속내를 들키는 걸 두려워 한다. 선생님들은 모두 뭔가를 아는 듯 지민과 태형에겐 그 어떠한 것도 묻지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투명 인간처럼, 교실 속 수 많은 아이들 속 빈 자리인 듯이. 지민의 목소리를 들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그 이후로 지민은 학교에 잘 나오지도 않았다. 물론 태형 또한 지민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 아무도 트집 잡지 않았다. 모두 궁금하고 알 수 없었지만, 아무도 선뜻 캐내려 하지 않았다. 

평소와 같이 늘 그랬듯이 지민과 태형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은 빈 자리 둘을 보더니 난처해 하는 표정을 보였다. 정말 중요한 개인 통지문이랬다.


- 주소 알려 주시면 제가 전해 주겠습니다. 

- 그럴래? 


제가 반장이니까요. 반장이 이럴 때 나서라고 있는 거죠. 선생님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감돌았다. 학교에서 꽤 먼 거리의저택. 이래서 늘 학교 앞에 일제식 자동차가 주차 되어 있었던 걸까. 도저히 매일 걸어 다니기엔 힘든 거리였으니. 날카로운, 짐승의 송곳니 같은 뾰족한 것들이 문을 감싸고 담장 높이는 정국의 서너 배 높아 보였다. 이런 집은 어떻게 들어 가라는 거지. 노크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리저리 문 주변을 더듬거리다 눌린 버튼 하나에 띵동하고 소리가 울리자 놀라 뒷걸음질쳤다. 


- 誰ですか. (다레 데스까/누구시죠.)

- こ..んにちは. (곤..니치와/ㅇ..안녕하세요.)

- 朝鮮人ですか? (조센징 데스까/조선인이세요?)

- はい! (하이!/네!)

- 무슨 일이시죠?

- 아, 다행이다. 한국말 할 줄 아시는 구나. 지민이랑 태형이 반 반장인데, 전해 줄 게 있어서요.

- 들어 오세요.


저절로 열리는 문에 놀라 살짝 뒷걸음질 치던 정국이 헛기침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세네 개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저택 안에 닿을 수 있었다. 커다란 샹들리에가 반짝이고 온통 태어나 처음 보는 것들. 살면서 저런 것들이 있는지 알 수나 있었을까 싶은 커다란 괘종 시계와 장신구들, 그리고 저건 축음기인가.


- ..실례합니다.

- 주세요.


아 깜짝이야. 옆에서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자 제게 손바닥부터 내미는 태형이 벽에 기댄 채 서 있었다. 주섬주섬 주머니 속 고이 접어 둔 봉투를 빼내자 건네기도 전에 손에서 낚아 챈 태형이 정국을 문 밖으로 밀어 냈다.


- 이제 나가 보세요. 볼 일은 끝나셨잖습니까.


속으로 아니, 무슨 손님 대접이 이래. 라고 곱씹어 보지면 돌처럼 단단한 눈빛과 날렵한 콧날이 꽤나 위협적이었다. 알았어, 간다고 가. 누가 안 간대? 


- 타케루, 손님 대접이 왜 그래.



처음 듣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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