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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눈사람

소복히 쌓인 것이 당신이기에 내겐 봄이 오지 않아도 좋아요.

매 년 봄이 지나 여름이 지나,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찾아 온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지 1년.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 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과거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추억 한 움쿰.



- 형, 지금 밖에 눈 와요!


또 다시 연말이구나, 바쁘겠네.


- 벌써 겨울이구나.

- 그러지 말고 우리 눈사람 만들러 가요, 응?

- 이렇게 추운데? 영하 5도야 지민아. 형은 내일 출근도 해야하고. 연말이라 더 바쁠 거고..

- 알았어요, 안 보챌게요.


형이 서재에 들어간 후 지민은 홀로 장갑을 끼고 목도리를 돌돌 감은 채 밖을 나섰다. 환기 안 되는 집 안에서 히터 바람 앞에 있는 건 도무지 답답해서, 더이상의 잠깐의 산책도 요구하기 미안한 사람이라, 상쾌한 바람을 지나며 예전에 갔던 공원에 도착했다. 우리가 앉았던 벤치 그 옆. 아직 눈이 소복히 내리지 않아 눈사람의 몸통 밖에 만들지 못했다. 


머리가 없는 눈사람이 마치 형과 나 같아요. 둘이 아니고선 안 될 것처럼 사랑했지만, 녹아 사라지고 반 쪽 밖에 남지 않은 채 여기 이대로 남아있어요. 우리가 남겼던 흔적에 그대로반 쪽 뿐인 내가 남겨져 있어요.



- 이번에 회사에서 행사를 25일에 잡았더라고, 우리는 24일날 같이 있으면 안 될까?


그렇게 미안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면, 싫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무슨 회사가 그런 날 행사를 잡냐고 말할 수도 없어서. 


- 그래요.


사정이 뻔히 보이니까, 욕심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매번 회사에게 저녁 식사와 새벽을 반납하고 주말을 내어 주는 모습에 더이상 내가 들어갈 자리가 보이지 않아요.


12월 24일, 지민이 좋아하는 요리를 먹으러 가자는 윤기는 부시시한 머리에 잔뜩 지친 얼굴과 쳐진 눈가에 억지로 끌고 가기도 미안해 보였다. 그냥 집에서 쉬자는 말에도 기어이 밖으로 나와 음식점에 마주 앉아 본 윤기는 창백하기 짝이 없었다. 그 속에, 그 창백함 속에 내가 남아 있긴 할까.


- 그만 멈춰요 여기서. 


형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까 예상했을지 모르겠지만. 헤어지자는 말은 도저히 가슴 아파 꺼낼 수가 없어서, 조금 비겁하게 돌려 말했다. 요즘 내가 회사 일로 보채지도 않고 투덜거리지도 않았던 걸 알고 있기나 할까. 그런 내 말을 이해했다는 듯 오물거리던 입도 멈추고 손동작도 멈추었다. 유일하게 요동치는 건, 거세게 흔들리는 동공 뿐이었다.



- 어, 그래. 그러자.


끝까지 형은 간단명료하고 정말 간결하구나. 나만 늘 복잡했구나, 나만 늘 소중했구나. 이유같은 거 물어보지도 않는구나. 어쩌면 스스로 내가 말해 주기를 기다렸을 지도 모르지. 그래요, 우리 그만해요. 더이상 인연이 아닌가 봐요.


- 먼저 일어날게요.










시간이 지나면, 그게 1년이든 10년이든, 그 자리가 메워지는날이 오겠죠. 남들도 다 이렇게 헤어지는 거겠죠. 이 겨울의 눈이 다 내리고 나면, 사라지고 봄이 오듯. 형이 소복해진 내 마음 속 겨울도 언젠간 녹아내리고 봄이 찾아 오겠죠.





다음 해, 겨울은 또 찾아 왔다.



윤기의 회사 기업 간의 정말 커다란 규모의 연말 시사회, 모두들 축하를 위해 기립했다가 박수를 치기도 하고, 자리에 앉아 소감을 듣고 위로를 전하는 자리.


- 올해의 프로젝트 팀은!


한껏 빼입은 수트와 앞에 놓인 와인잔, 모두가 웃고 즐기고 행복해 보였다. 마침내 윤기의 팀이 호명되고 팀원들과 어깨를 부둥키며 마이크 앞에 섰다. 그래, 잘 했어. 올해도 수고했어 민윤기. 원하던 상이었잖아. 원하던 성과였잖아.



이 번 프로젝트만 성공하면, 이 번 것만 해결하면, 이 것만 어떻게 해 보면 끝날 것 같던 것들이 연속되고 끊임없고 그런 무한한 일들도 네 옆에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쓸데없이 단정지었나 봐. 돈과 명예 모든 걸 가지고 박수갈채까지 얻었지만,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 순간이 너무나 잔혹해서, 끔찍해서 나오는 눈물에 볼살이 따끔거렸다.



[폭설주의보] 00시, 폭설이 예정되오니 가급적 외출을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반짝 거리는 수트와 왁스와 스프레이가 칠해진 머리, 한 손에쥐어진 트로피와 꽃다발. 그리고 지민을 만난지 얼마 안 돼 갔었던 공원 길을 걸었다. 12월 31일 올해의 마지막 날. 가족들과 집에서 따스히 시간을 보내는 누군가들관 달리 누구는 텅빈 공원을 우산도 없이 옷 속으로, 한껏 멋부린 머리칼 사이로 눈이 들어오는 걸 그대로 흘러가듯 두었다.


길가 벤치에 앉아 지민이 앉아 있던 곳엔 트로피와 꽃다발이 놓였다. 내가 이 사단을 만든 주범이니까, 나는 울 자격도 탓할 자격도 없다. 딱딱한 의자 위 눈을 털다 벤치 옆에 놓인 눈덩이가 보였다.


‘눈사람 만들러 가요, 응?’


어느새 소복히 쌓인 눈, 윤기는 미완성된 눈사람 위에 조금 더 작은 눈덩이를 올려 머리를 만들고, 그 옆에 또 하나의 눈사람을 만들었다. 하아- 하아- 맨 손으로 만진 눈에 손이 새빨갛게 변해 버렸다.

다시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꺾어 의자에 기대었다. 눈이 얼굴 위로 그대로 떨어져 흘러내렸다. 코끝이빨갛고 눈이 충혈되었지만 이 것이 정말 추워서인지 슬퍼서인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윤기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어 물었다. 라이터를 주머니에서 더듬거리어 빼내자, 제 얼굴 위로 떨어지던 눈이 멈추었다.


노란색 우산, 지민의 우산이었다. 옆을 돌려 보았을 때엔 지민이 제게 본인의 우산을 씌워 주고 떨어지는 눈을 그대로 맞고 있었다.



- 상쾌하다. 난 겨울에 태어난 것도 아닌데, 겨울이 왜 이렇게좋을까요. 













* ‘겨울’과 ‘윤기’를 동일시(상징화)시켜 써 본, 때 늦은 겨울 글입니다..,


오타 지적&피드백은 매우.. 아주..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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